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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과 위안

작성자 운영자(ip:)

작성일 2020-08-04

조회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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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해마다 3·1절이 되면 100년 전 우리 겨레가 일본제국의 침략과 억압에 짓눌려 고통받고 신음하고 있을 때 가톨릭교회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하는 의문이 고개를 쳐들어 힘들었다. 일본제국이 조선의 백성에게 자행한 사회적 불의와 억압에 무관심과 침묵으로 일관한 데 대해서는 100년이 지난 지금에라도 천주교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몇번이고 사죄하고 용서를 청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가톨릭교회의 성직자로 46년을 살아온 사람이다.

<한겨레>에서 기고 부탁을 받자 내 마음속에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내 나이에 또 무슨 말을 해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가르치려 하는가?

또 새로운 말을 해서 사람들을 깨우치기보다는 이미 쏟아낸 말만큼 살아오지 못한 일에 대해

고백하고 용서를 청하는 것이 내가 해야 할 도리가 아닌가?’

나라는 사람에게는 모자라는 구석이 많아서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고 채우지 못한 부분이 참으로 많다.

하지만 그것은 고백소에서 하느님께 사죄를 드리고 용서를 청하면 될 일이지,

미주알고주알 늘어놓아 여러 사람들 귀를 어지럽힐 필요도 가치도 없다.

그런데 가톨릭교회를 공적으로 대표하는 성직자로 수십년을 살아온 사람으로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그냥 넘어가기 어려운 고백 거리가 자꾸 머리에 떠오른다.


오래전부터 마음에 걸렸던 것이 3·1운동과 가톨릭교회의 관계다.

나는 해마다 3·1절이 되면 100년 전 우리 겨레가 일본제국의 침략과 억압에 짓눌려

고통받고 신음하고 있을 때 가톨릭교회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하는 의문이 고개를 쳐들어 힘들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 천주교 인사는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당시 조선천주교회를 대표하던 뮈텔 주교는 3·1운동 10년 전인 1909년에 일어난

안중근 의사의 이토 저격 사건을 탐탁지 않아 했고, 사형집행을 앞둔 안 의사가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던 빌렘 신부의 방문과 고백성사를 청하는데도 허락하지 않았다.

빌렘 신부는 교구장의 뜻을 어기고 안 의사를 방문하여 고백성사를 주었고,

빌렘 신부는 장상의 명을 따르지 않은 탓으로 얼마 후 소임지를 떠나 프랑스로 돌아가야 했다.


1919년 3·1운동이 거국적으로 전개될 무렵,

3월5일 대구 유스티노 신학교의 신학생들 약 60명이 운동장에 모여 독립 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3월9일 대구 약전골목 만세 행렬에 합류하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이 사실이 프랑스인 교장 신부에게 알려져 유인물과 태극기를 모두 압수당했다.

대구교구장 드망즈 주교는 신학교를 방문하여 신학생들을 한자리에 모으고 만세 운동의 참가를 금했다.

만일 만세 운동에 참가하면 신학교를 폐쇄하겠다고 밝혔다.

신학생들은 수업에 거의 참석하지 않음으로써 자신들의 소신과 심정을 표현했다.

서울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도 3월23일 밤 신학생들이 신학교 문을 나와

만세 운동을 펼치는 군중에 합류하였다.

이튿날 서울교구장 뮈텔 주교는 신학교로 달려갔다.

신학생들은 일본인들에게 짓밟힌 조국을 외면할 수 없다며 눈물로 호소하였다.

그럼에도 뮈텔 주교는 신학생들의 만세 운동 참여를 금하고 만세 운동을 주도했던 신학생들은

퇴학조처 되었다.


왜 당시 프랑스 선교사들이 이렇게까지 조선인들의 항일 운동에 부정적이었을까

그분들 입장을 헤아려 보았다.

조선천주교회는 100년에 걸친 조선조정의 혹독한 박해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신자들과

12명의 프랑스 출신 선교사들이 목숨을 바쳐야 했다.

1899년에 이르러서야 교회는 조선 정부와 ‘교민조약’을 합의하고 신앙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당시 교회를 이끄는 성직자들의 입장이라면 순교자들의 피가 채 마르지 않은 시점에서

조선의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한 일본제국과 또다시 맞선다면 교회는 감당하기 어려운

새로운 박해시대를 초래하리라는 우려에 시달렸으리라 짐작된다.

1866년 병인박해 시기에 헨리코라는 젊은 프랑스 선교사 신부가 한낮에 밖을 돌아다녔다.

이를 들은 장시메온(베르뇌) 주교는 이 젊은 신부를 불러 크게 꾸짖었다.

“당신 혼자 체포되는 것도 문제지만, 당신 때문에 많은 신자들이 박해를 받고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가볍게 행동하느냐?”라고.

이 두 분 다 병인박해 기간에 체포되어 순교자들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1900년대 초기 아직 조선천주교회 지도층 성직자들은 프랑스 출신 선교사가 대다수였고,

프랑스인으로서 선교사들의 일본에 대한 국가관은 조선인들과는 달랐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 일본이 영국, 프랑스 쪽에 가담하니 프랑스 선교사들에게

일본은 우방으로 비추어졌고, 천주교 신자들과 성직자들을 오랜 세월 잔혹하게 박해하던

조선왕조의 몰락은 내심 꿈꾸고 기다리던 새로운 시대의 도래로 다가오지 않았을까?

그러나 조선의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을 전하기 위해 온갖 고초를 무릅쓰고

땅끝까지 달려온 선교사들이, 나라와 땅을 강탈당하고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문화와 언어와

이름마저 빼앗겨 목숨 걸고 저항하는 백성들의 통한과 피눈물에 연민과 연대로 다가가지 못하였음은

 복음의 사도로서 치명적인 결격이다.

또 일본제국이 조선의 백성에게 자행한 사회적 불의와 억압에 무관심과 침묵으로

일관한 데 대해서는 100년이 지난 지금에라도 천주교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몇번이고 사죄하고 용서를 청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가톨릭교회의 부끄러움을 안고 살던 내가 제주에 부임한 뒤 놀라운 사실을 접하게 되었다.

그것은 프랑스 선교사 구마실(라크루) 신부가 제주에 설립한 신성여학교의 1회 졸업생 ‘강평국,

고수선, 최정숙’ 세 가톨릭 여성들의 놀라운 행적이다.

신성여학교를 졸업한 이들은 모두 3·1운동이 일어난 당시 서울 경성여고보(경기여고)에 유학해

졸업을 눈앞에 두고 만세 운동의 대열에 참가했다.

이들은 3·1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 청년층 연락책 박희도 선생과 접촉하고,

소녀결사대에 가입하였다.

학교 당국은 학생들의 외출을 막았으나 이들은 문을 부수고 학교를 빠져나가 시위대열에 합류했다.

 파고다 공원에서 시작된 시위에서 강평국은 안국동 쪽으로, 최정숙은 진고개 쪽으로 가다가 체포되었다.

최정숙은 회고록에서 “죽을 것을 각오했기에 속옷에 주소, 성명, 학교, 고향,

부모 이름까지 써 붙이고 파고다 공원에 갔다”고 썼다.

최정숙은 닷새 동안 심한 고문과 조사를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8개월 가까운 수감 생활을 했다.

강평국은 3월5일 2차 시위 때 검거되었다가 3월24일 풀려났다. 강평국과 최정숙은

그 후 고향에 내려와 여학생들을 위한 야학을 설립하고 여성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고수선도 졸업 후 독립운동자금 모금과 전달에 관여하다가 경찰에 체포되었고,

손가락이 기형이 되도록 심한 고문을 받았다.

강평국은 그 후 동경여자의과대학으로 유학을 가 의학도의 길을 걸었으나 도중에 건강 악화로

귀국하였고, 불온단체 관련 혐의로 경찰의 조사와 고문에 시달리다 33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세 분 다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었다.

천주교를 대표하는 지도자들은 3·1운동을 외면하고 겨레의 고통에 눈길을 주지 않았으나,

이 젊은 여성 세 사람의 용감하고 거룩한 생애는 우리에게 큰 위안과 희망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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